중국 반도체 · 심층
빅3에서 빅4로 — 중국이 범용 디램 시장을 삼키는 법
30년 넘게 삼성·하이닉스·마이크론 세 회사가 사실상 전부였던 디램 시장. 그 견고한 삼국 구도에 처음으로 중국 이름 하나가 비집고 들어왔다. 인공지능이 만든 슈퍼사이클의 그늘에서, 빅3가 고부가 메모리로 떠나며 비운 자리를 중국 창신메모리(CXMT)가 통째로 삼키고 있다.
삼국에서 사국으로
변화는 시장조사기관의 표현에서 먼저 드러난다. 오랫동안 ‘빅3’로 불리던 디램 시장을 두고, 이제 TrendForce는 삼성·하이닉스·마이크론에 중국 창신메모리를 더해 ‘빅4’ 구도가 굳어졌다고 적는다. 한 세대 동안 세 이름만 앉아 있던 식탁에 네 번째 의자가 놓인 것이다.
아래 두 원형 그래프는 그 변화를 한눈에 보여준다. 왼쪽 2021년, 세 회사가 약 95%를 가져가던 시절에는 중국의 조각이 보이지도 않았다. 오른쪽 최근 구도에서는 짙은 청록색 — 창신메모리의 조각이 또렷하게 자리를 차지한다.
글로벌 디램 점유율 — 빅3 시대 vs 빅4 시대
매출 기준 점유율 (%) · 출처: TrendForce, 창신메모리 상장 투자설명서
매출 기준 점유율. 인공지능용 고대역폭메모리가 빅3 매출을 부풀리는 점을 감안하면, 범용 디램만 떼어 보면 중국의 실질 비중은 이보다 더 크다. 2021년 수치는 연간, 2026년은 최근 분기 기준 근사값.
빈자리는 어떻게 생겼나
중국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역설적이게도 빅3가 직접 만들어 줬다. 세 회사는 지금 저가 범용 메모리에서 스스로 발을 빼는 중이다. 구형 규격인 디디알4(DDR4) 제품에 잇따라 생산종료를 통보했고, 남는 생산 능력을 인공지능 가속기에 들어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로 돌리고 있다. 같은 웨이퍼라면 고부가 제품을 만드는 편이 압도적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삼킨 중국 — 창신메모리의 폭발
빈자리로 가장 빠르게 밀고 들어온 것이 창신메모리다. 월 생산 능력은 2020년 4만5천 장에서 2026년 30만 장 수준으로 불어났고, 저가 범용을 발판으로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가격이 폭등하자, 실적이 비현실적인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상하이증권거래소에 제출된 상장 투자설명서가 그 폭발을 그대로 보여준다. 매출은 2022~2023년 80억~90억 위안대에서 정체하다, 2025년 618억 위안으로 한 해 만에 네 배가 됐고, 2026년 상반기에만 1,100~1,200억 위안 — 직전 한 해 매출의 약 두 배가 예고됐다.
창신메모리 연간 매출 추이
단위: 억 위안 · 출처: 상장 투자설명서
*2026년 상반기는 회사 가이던스(반년치). 나머지는 연간 실적. 1억 위안 ≈ 약 1,375만 달러.
손익의 반전은 더 극적이다. 창신메모리는 2022~2024년 3년 내내 적자였고 누적 손실은 약 366억 위안에 달했다. 그런데 2025년 18.8억 위안으로 첫 흑자를 낸 데 이어, 2026년 상반기에만 500억~570억 위안의 순이익이 예고되며 창사 이래 누적 적자를 단 6개월 만에 전액 지워낼 판이다. 1분기 하루 평균 순이익만 약 2.7억 위안이었다.
창신메모리 순이익 — 3년 적자에서 수직 반전
단위: 억 위안 (지배주주 귀속) · 출처: 상장 투자설명서
*2026년 상반기는 회사 가이던스(반년치). 폭발의 동력은 순수하게 범용 디램 가격 상승이다.
이 폭발을 등에 업고 창신메모리는 상장을 코앞에 두고 있다. 약 295억 위안(약 44억 달러)을 조달하는 이 거래는 성사되면 커촹반(스타마켓) 역사상 최대 규모이며, 시장에서 거론되는 기업가치는 3조 위안을 넘는다. 5월 27일 상장 심사를 통과해 등록 절차에 들어갔다. 낸드 쪽 짝꿍인 양쯔메모리(YMTC) 역시 상장 채비에 나서, 중국의 두 메모리 거인이 나란히 자본시장 문을 두드리고 있다.
중국의 활주로, 그리고 천장
중국의 추격에는 강력한 엔진이 달려 있다. 정부는 자국에서 스마트폰 등 완제품을 만들 때 중국산 메모리를 쓰면 금액의 일부를 보조하는 방식으로 내수 점유율을 밀어 올린다. 거대한 내수 시장과 국유 자본의 무제한에 가까운 지원이 더해지면서, 한때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 때 작동했던 ‘눈덩이 효과’가 재현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천장도 분명하다. 창신메모리의 핵심사업 매출총이익률은 2025년 41%까지 올라왔지만, 같은 해 하이닉스의 60%에는 한참 못 미친다. 이 격차의 본질이 바로 고대역폭메모리의 부재다. 인공지능 시대의 가장 비싼 자리에는 아직 발을 들이지 못했고, 미세 공정은 한 세대가량 뒤처져 있으며, 미국의 첨단 노광장비 수출 규제가 추격 속도를 누른다.
이미 본 적 있는 영화 — 디스플레이의 교훈
지금 메모리에서 벌어지는 일이 어딘가 낯익다면, 그 직감이 맞다. 한국 산업은 똑같은 영화를 디스플레이에서 먼저 봤다. 줄거리는 소름 끼치게 닮았다. 국가 보조금으로 무장한 중국이 먼저 저가 제품을 물량으로 밀어붙여 가격을 무너뜨리고, 한국이 적자를 견디다 사업을 접고 고부가로 후퇴하면, 중국이 끝내 그 고부가까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1막은 LCD였다. 2011년만 해도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가 LCD 시장의 약 55%를 쥔 절대 강자였다. 그러나 BOE·CSOT(TCL)·HKC 같은 중국 업체가 보조금을 등에 업고 생산 능력을 쏟아내자 패널 가격이 붕괴했다. LG디스플레이는 2022년 약 2조 원, 2023년 약 2조5천억 원의 영업적자를 냈고, 삼성디스플레이는 2022년 LCD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LG디스플레이마저 2025년 마지막 LCD TV 공장(광저우)을 중국 TCL에 넘기며, 한국은 LCD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지금 중국은 전 세계 LCD 생산 능력의 70% 이상을 쥐고 있다.
디스플레이에서 본 미래 — 중국 점유율의 잠식
중국 업체 합산 점유율 (%) · 출처: Omdia, TrendForce, ITIF
LCD 점유율은 생산능력 기준, OLED는 스마트폰 패널 기준. 한국은 LCD에서 55%(2011)에서 사실상 0%로 후퇴했다.
그리고 2막, OLED가 지금 상영 중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삼성·LG디스플레이가 스마트폰 OLED의 90% 가까이를 장악했다. 그런데 2024년 BOE가 스마트폰 OLED 패널 출하량에서 삼성디스플레이를 처음으로 추월했고, 한국의 합산 점유율은 60% 아래로 내려앉았다. 한국이 “여기는 기술 격차가 있으니 안전하다”고 믿었던 그 고지마저, 중국은 보조금과 물량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지켜봐야 하나
지금까지 중국은 빅3가 ‘버린 땅’인 저가 범용을 주워 담으며 컸다. 진짜 분기점은 그 다음이다. 창신메모리가 데이터센터용 디디알5(DDR5)라는 ‘고지의 초입’까지 사다리를 올라오는 순간, 빅3가 사수하려던 고부가 영역에도 가격 압박이 번진다. 그 시점은 빅3의 대규모 신규 공장이 함께 가동되는 2027~2028년과 겹친다.
동시에, 창신메모리의 화려한 숫자는 100% 범용 가격에 노출돼 있다는 약점이기도 하다. 빅3에게는 고대역폭메모리라는 완충재와 장기 계약이라는 갑옷이 있지만, 중국에는 아직 둘 다 없다. 범용 가격이 꺾이는 국면이 오면, 가장 가파르게 번 만큼 가장 가파르게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방향성은 분명하다. 30년 삼국 구도는 이미 사국 구도로 바뀌었고, 식탁의 네 번째 의자는 비어 있지 않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중국은 발밑의 범용 시장을 지키는 데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 디스플레이에서 LCD를 삼킨 뒤 OLED로 올라섰듯 — 빅3가 사수하는 고대역폭메모리라는 그 고지까지 끝내 따라 올라올 것인가. 디스플레이가 먼저 보여준 그 영화의 결말을, 메모리는 아직 쓰는 중이다.
수치 출처: 창신메모리(CXMT) 상하이증권거래소 상장 투자설명서, TrendForce 디램 점유율·가격 자료, 기업 실적발표. 디스플레이 점유율은 Omdia·TrendForce·ITIF 자료 기준. 점유율은 산정 기준(매출·출하·생산능력)에 따라 기관별로 차이가 있으며, 2021년은 연간·2026년은 최근 분기 근사값이다. 환산 기준은 작성 시점. 본 글은 정보 제공을 위한 분석이며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 권유가 아니다. 상장 확정 시 최종 공시본과 수치를 재대조할 것을 권한다.